허진규 회장의 ‘애국 리더십’
엔지니어이자 원조 벤처기업인으로서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도전과 창조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은 산업보국(産業保國), 기술보국(技術保國)의 리더십
“과학기술 분야가 강해야 진정한 강국이고, 일류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진정한 애국입니다. 그리고, 엔지니어야말로 21세기 혁신과 기술 전쟁 시대의 장수(將帥)입니다.”
군복무 시절 육군본부 병기감실에서 깨달은 사명감
“낙후된 대한민국 산업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운명을 걸다.”
1965년, 허진규 회장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소위(ROTC1기)로 임관하여 서울 용산에 있던 육군본부 병기감실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병기감실은 총포와, 탄약 등 군의 병기에 관한 일을 총괄하던 특별 참모 부서였습니다. 허 회장은 이곳에서, 우리나라를 지키는 대부분의 군수물자가 미국 등 외국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을 목격했습니다. 전기, 발전, 건설 등 대부분의 사회 기간산업, 기초산업이 외국의 기술과 자본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군에서 이 같은 경험을 한 허 회장은, 공학도로서의 사명감을 바탕으로 낙후된 대한민국 산업의 현실을 바꾸는 데 자신의 운명을 걸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미래 엔지니어 꿈나무 양성과 전문가 후원 활동
“혁신은 인재로부터! 산업보국의 신념 지키다.”
엔지니어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허진규 회장은“과학기술 분야가 강해야 진정한 강국이고, 일류 기술을 개발하 는 것이 애국”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또,“세계 일류 기술을 개발하려면 혁신이 필요한데, 엔지니어야말로 21세기 혁신과 기술전쟁 시대의 장수(將帥)”라고 말해 왔습니다. 허 회장은 1993년에 설립한 일진 학술문화재단을 통해 이공계 꿈나무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장학금을 지원하고, 한국공 학한림원‘일진상’을 통해 뛰어난 업적을 이룬 전문 공학인을 후원하는 등 평소의 신념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또, “기업의 혁신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미래를 위한 혁신이 필요하다”며, 1990년 서울대학교에‘신소재공 동연구소’를 지어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이 연구소는 기업이 연구소를 지어 대학에 기증한 국내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허진규 회장의 ‘도전 리더십’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과 제품 개발! 21세기 일류 기업 달성의 힘, 도전 리더십!
“남들이 다 하는 것을 따라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해야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누가 저에게‘일진의 지난 40년을 한 단어로 말해보라’고 한다면 저는 주저 없이‘도전’이라고 할 것입니다. 시대를 관통해 지금까지도, 아니 앞으로도 계속되고 지켜야 할 일진의 정신과 문화는 바로‘도전’입니다.”
1968년 1월 22일, 일진금속공업사 창립
“10평짜리 집 마당에서 도전과 창조의 역사를 시작하다.”
허진규 회장은 1968년 1월 22일 서울시 영등포구 노량진동 211의 53번지, 10평 남짓한 집 앞마당에 100kg짜리 흑연 도가니 와 기본적인 주물 설비를 사다가 설치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일진그룹을 일군 첫 발자국이었습니다. 금속사업, 그 가운데서도 알루미늄과 같은 비철 주물 사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알루미늄 합금은 각종 제조업이나 기간 산업 분야에서 필수적으로 쓰이는 소재였지만, 당시에는 일본과 같은 선진국으로부터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하지 못한 일, 그러나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 - 허 회장은 그런 과제를 찾아 도전을 시작하였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가장 성공적으로 극복!
“대한민국 언론, 허진규 회장을 ‘원조 벤처기업인’이라 부르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속에서도 일진그룹은 반도체 사업에 신규로 진출하였고, 1997년도 조치원(현 세종시)에 세계 최대 일렉포일 생산 단일 공장을 준공하는가 하면, 일진다이아몬드는 첨단 소재 개발에 착수하였습니다. 허진규 회장의 첨단 신소재 산업에 대한 열정, 경영진의 적극적인 경영 개선 노력, 그리고 일진가족 모두의 단합된 힘을 바탕으로 일진그룹은 총체적인 국가 경제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갔습니다. 이후, 언론들은 ‘외환위기를 가장 성공적으로 극복한 기업’을 소개하면서 일제히 일진그룹을 그 서두에 언급했습니다. 또 일진그룹을 ‘원조 벤처기업’이라 평가하였고, 허 회장을 ‘원조 벤처기업인’으로 재조명했습니다.
허진규 회장의 ‘뚝심 리더십’
국가와 미래를 위한 것이라면 과감한 투자와 연구개발을 주저하지 않았던 일진그룹의 원칙과 정도(正道),‘뚝심 리더십’!
“기업이 가야 할 원칙과 정도(正道)가‘뚝심’입니다. 그 뚝심을 지키면 언젠가 상식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실패 없는 도전은 없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뚝심을 지켜 일진의 새 시대 개척을 위해 도전합시다.”
1997년, 2만회 이상 실험 끝에 일렉포일 개발 성공!
“뚝심이 수율 90% 이상의 최고급 일렉포일을 만들다.”
1997년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치원 일렉포일 3공장을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일진 Materials의 대표였던 김윤근 박사를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 박사는 공동연구를 시작한 1984년부터 1997년까지 2만회가 넘는 실험을 거듭했어요. 그런 마음과 정성과 노력이 하늘을 움직였는지, 1997년 10월에 제품의 불량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 어떤 일에 실패를 하거나 실수를 할 때 보통 사람들은 15회 정도, 뛰어난 사람은 150회 정도 이상 다시 도전을 한다고 합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할 때까지 1만 5천회나 실험을 계속했다고 하니, 김 박사의 도전 정신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할 수 있죠. 허진규 회장은 그와 같은 임직원의 ‘뚝심’이 일렉포일이라는 첨단 기술 제품을 개발해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강조합니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 1989~1994, GE소송전
“원칙과 정도(正道), 그리고 ‘뚝심’ 앞에서 거대 기업 손들다.”
1985년 일진그룹이 공업용 합성다이아몬드 개발에 착수하자 미국의 GE는 일진에게 다이아몬드 사업을 포기하도록 직간접적으로 종용했습니다. 일진이 뜻을 굽히지 않자 1989년 10월, 미국 보스턴 연방법원에 일진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그 동안 공업용 합성다이아몬드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시장을 일진이라는 회사 때문에 포기해야 한다는 초조함이 결국 GE의 직접적인 행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허진규 회장은 “창업 후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기업이 가야 할 원칙과 정도(正道)를 지킨다면 언젠가 상식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뚝심’있게, 그리고 당당하게 대응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이후 미국 법정에서 6년 간에 걸친 치열한 재판 과정이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994년 4월 GE는 마침내 소송을 포기하고 일진에 화해를 제의해 왔습니다. 일진의 다이아몬드 생산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허진규 회장의 ‘기술 리더십’
호랑이처럼 보고 소처럼 걷는다는 호시우보(虎視牛步)의 자세와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마부작침(磨斧作針)의 마음으로 세계를 선도해 온 '기술 리더십!'
세계 최고의 기술로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내야만 우리는 미래의 치열한 경쟁을 극복하고 세계를 선도할 수 있습니다.
1976년, 국내 최초 동복강선 개발 성공
“기술에 대한 확신과 투자로 도약의 길에 들어서다.”
일진은 1974년 4월 24일, KIST와 동복강선(銅覆鋼線, copper-clad steel wire) 공동 개발 계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인 제품 개발에 참여했습니다. 연구비용은 일진과 KIST에서 각각 3,000만원씩 부담하기로 하였는데, 당시 일진의 자본금이 3,000만원이었습니다. 이름조차 생소한 작은 기업이, 다른 대기업에 제시한 금액보다 월등히 많은 금액을 제시한 이 사건은 당시 업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76년 3월, 허진규 회장은 KIST와 함께 동복강선 개발에 성공합니다. 기술개발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갖지 않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허 회장은 “당시 경제개발계획과 농어촌 근대화 사업을 충족하기에, 국내 전선업계의 동선(銅線) 물량은 역부족이었다” 며 “저렴하고 품질이 우수한 대체 제품이 필요하다는데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해당 기술에 대한 도전과 투자를 망설일 일이 아니었다”라고 단언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술품, 블랙아트(Black Art) – 일렉포일(Elecfoil),
“혼(魂)을 담아 완벽을 추구하다.”
반도체가 전자산업의 ‘쌀’이라면, 일진의 일렉포일은 전자산업의 ‘논과 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황산구리용액을 전기 분해해서 만든, 두께 1000분의 1mm의 구리 박(箔)이 인쇄회로기판의 회로를 타고 논과 밭의 물처럼, 사람의 혈류처럼 전기와 전자신호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일렉포일 제조 공정은 모기 한 마리만 침입해도 몇 백 미터에 해당하는 불량을 초래하고, 제조 과정에서 전기가 멈추면 양질의 제품생산이 불가능할 정도로 까다롭습니다. 일본의 엔지니어들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새로운 제품불량을 만나고 있다”며,“일렉포일 제조과정은 매번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도예가의 스트레스와 같다”고 말합니다. 또, 서양에서는 “일렉포일 기술은 블랙아트(Black Art), 마법이다. 그 어떤 전자 소재도 일렉포일만큼 혼이 들어간 것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1999년 12월, 과학기술부는 일렉 포일을 ‘20세기 대한민국 100대 기술’로 선정하여, 우리나라 반도체 혁명, 전자 산업 신화의 배경에 일렉포일 기술이 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1987년, 세계 세 번째 공업용 다이아몬드 생산!
“극한기술, 고부가가치 첨단 제품의 자체개발로 한국 산업 史에 한 획을 긋다!”
공업용 다이아몬드는 기계의 제조 및 가공, 반도체 제조 장치, 의학용 수술 도구, 자동차 부품 가공, 석재 및 금속 가공 그리고 우주 연구에 이르기까지 그 활용 범위가 무궁무진합니다. 공업용 다이아몬드는 이처럼 전기, 컴퓨터, 반도체 등 첨단 산업 분야에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자원이었지만, 1980년대 까지만 해도 영국 드 비어와 미국 GE가 세계시장을 양분하고 있었습니다. 1985년 일진은 마침내 공업용 다이아몬드 시장에 도전장을 던지고, 1987년 6월 세계에서 세 번째로 공업용 다이아몬드 생산에 성공하였습니다. 당시 국내 업계에선 섭씨 1500℃, 5만 기압 이상의 극한 공정을 요구하는 ‘공업용 다이아몬드 개발 도전’은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지만, ‘극한기술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해 온 일진만이 기술개발에 성공, 수입 대체는 물론이고 세계 시장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허진규 회장의 ‘혁신 리더십’
일진이 창업이래 멈춤 없이 성장해 온 이유, ‘도전과 혁신(Challenge & Innovation)’의 실천!
“저는 대기업이 아니라 최고의 기업을 꿈꿉니다. 기업은 단순한 외형이나 규모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도전과 혁신의 길을 가야 합니다. 21세기 최고의 기업! 우리가 혁신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혁신이 담긴 기술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이음매 없는 심리스강관으로 차세대 성장동력을 구축하다”
일진제강은 정밀인발강관, 이형형상재 등을 생산하는 특수강관 전문제조기업입니다. 특히, 고부가가치의 특수강관인 심리스강관(Seamless Tube)는 일진의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기대되는 제품입니다. 이 제품은 고급 철강재로 기술개발과 양산설비를 갖추려면 수천억원의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기 때문에 대기업들도 쉽게 뛰어들지 못한 분야였습니다. 투자 규모나 기술적 진입장벽 측면에서 난관이 예상되었고, 이를 우려해 주변에서는 모두 제품개발을 만류하였지만, 허 회장은 ‘심리스강관이야말로 혁신 제품이고, 일진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습니다. 기존 강관에 비해 안전성이 우수하고 활용분야도 넓어 글로벌 시장에서 수요가 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혁신기술을 확보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일진제강은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약 8년간 3천억원에 달하는 비용을 R&D에 투자해, 2012년 마침내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글로벌 심리스강관 생산업체들은 양산에 성공하기까지 30~36개월 가량이 걸렸지만, 일진제강은 2011년 2월 착공 이후 18개월 만에 양산에 성공했습니다. ‘짧은 시간에 손쉽게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이라면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이며, 혁신이 담긴 기술은 한 번 개발하기로 마음 먹은 이상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허 회장의 기술개발 철학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혁신적인 독자 기술로 세계 의료기기 시장에 도전장!
“혁신에 대한 신념이, 혁신의 미래를 앞당기다.”
허 회장은 일찌감치 의료기기 시장을 눈 여겨 보고 있었습니다. 2008년 5월 의료기기분야 벤처기업인 바이메드시스템 인수를 결정한 것도 향후 의료 기기 시장의 성장성과 혁신성을 내다봤기 때문입니다. 허 회장은 바이메드시스템 인수 후 기존의 초음파 기술보다 한 단계 진일보된 초음파 방식의 기술개발과 같이 시장 흐름에 맞는 혁신적인 기술 중심으로 사업전략을 수립하도록 주문했습니다. 2010년 8월, 회사명을 알피니언메디칼시스템으로 바꿨습니다. 2008년 인수 후 2011년까지 약 4년간 이 회사의 매출액은 ‘제로’였고, 투자금액은 점점 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허 회장은 끈기있게 기다렸습니다. ‘언젠가는 우리 제품을 독자적으로 개발해 혁신적인 기술을 세계시장에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알피니언 경영진에 대한 굳은 신뢰로 이어졌고, 마침내 2012년 알피니언 브랜드를 단 첫 제품을 출시하면서 그 결실을 맺었습니다. 현재 알피니언은 매년 2배 이상 성장하면서 매출액 1천억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 제품 영역도 초음파 진단기뿐만 아니라 초음파 치료기 시장까지 넓혀 혁신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세계 의료기기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글로벌 대기업들의 틈바구니에서도 알피니언의 기술력은 전혀 뒤처지지 않습니다. 그만큼 혁신기술 개발에 대한 허 회장의 굳은 신념이 알피니언의 미래를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것입니다.
2006 세계 최초 프로젝션용 싱글 LCD패널 개발 성공
“3개의 패널을 하나로! 창의적 발상이 혁신을 이끌다.”
일진디스플레이는 2006년 세계 최초로 '프로렉젼용 싱글 LCD 패널' 개발에 성공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 제품은 LCD 패널을 프로젝터나 프로젝션 TV에서 영상을 재현해 내는 핵심 부품입니다. 한때 대형 TV시장을 주도했던 프로젝션 TV 속에는 0.7인치 미만의 LCD 패널이 3개가 들어갔습니다. 3개의 패널이 빛의 3원색인 적색, 녹색, 청색을 쏘아 천연색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허 회장은 2001년 ‘1개의 패널로 천연색을 내보자’며 신기술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5년여 기간동안 기술개발에 투자한 돈은 천억원대. 그래도 성과가 뚜렷하지 않자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안팎으로 흘러나왔지만 허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2006년 4월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세계 최초 개발’이라는 타이틀의 쾌거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제품을 출시하고 상업화에 들어갔으나 결과적으로는 시장에서 외면을 받았습니다. 허 회장은 “기술개발을 하다 보면 난 더 기다려줄 수 있는데 직원들이 먼저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며 “실패한 기술도 축적이 되고 다른 식으로 응용하면 훌륭한 기술이 되는 만큼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혁신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정신은 실패라는 경험도 자산화 시키는 힘을 지닌다는 것이 허 회장의 ‘도전과 혁신’의 철학 입니다.